동탁 토벌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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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탁 토벌전은 후한 말, 동탁의 폭정에 대항하여 각 지역의 군벌들이 연합하여 벌인 일련의 군사적, 정치적 사건을 말한다. 환관과 외척의 권력 다툼으로 혼란스러웠던 후한 말, 동탁은 소제를 폐위하고 헌제를 옹립하며 권력을 장악했다. 이에 원소를 중심으로 한 연합군이 결성되어 동탁을 토벌하려 했으나, 각 세력의 이해관계와 군사적 역량 부족으로 인해 실패하고 분열되었다. 이후 동탁은 여포에게 암살당했으나, 그의 잔당과 조정 간의 권력 투쟁이 벌어지면서 후한 왕조의 붕괴를 가속화하고 삼국 시대의 서막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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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탁 토벌전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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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분쟁 | 후한 말기의 전란 |
부분 | 후한말의 전쟁 |
![]() | |
시기 | 190년 2월 ~ 191년 |
장소 | 허난성, 중국 |
원인 | 알 수 없음 |
결과 | 결착이 나지 않음; 동탁은 서쪽으로 후퇴, 연합군은 해산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반동탁 연합군 |
교전국 2 | 동탁 |
지휘관 | |
연합군 지휘관 | 원소 조조 원술 손견 장막 한복 포신 원유 장초 장양 마등 어부라 공주 왕광 유대 교모 유비 |
동탁군 지휘관 | 동탁 여포 이각 곽사 화웅 서영 호진 장제 우보 번주 이유 |
병력 규모 | |
연합군 병력 | 100,000+ |
동탁군 병력 | 연합군보다 적었을 것으로 추정 |
관련 전투 |
2. 배경
후한 말, 환관과 외척의 전횡으로 인해 한나라는 크게 쇠락하였다. 낙양의 태학을 중심으로 모인 사대부들은 환관들의 행태를 비판하다가 당고의 금 사건으로 탄압받았고, 이는 민심 이반과 전국적인 반란으로 이어졌다.[4] 이러한 상황에서 십상시의 난으로 인한 영제의 죽음, 하진의 죽음, 십상시의 몰살 등 혼란을 틈타 동탁이 군대를 이끌고 수도에 입성하여 황제의 신병을 확보하고 금군을 장악했다.
동탁은 소제를 폐위하고 진류왕 유협을 옹립했는데, 이는 하태후라는 강력한 외척이 뒤에 있는 소제와는 달리 어리고 후견인이 없는 유협을 옹립하고 그 후견인을 자처함으로써 정권을 마음대로 휘두르기 위한 사전 작업이었다. 이로 인해 원소는 실각하여 달아났고, 노식, 원술, 조조 등도 동탁에게서 달아났다. 동탁은 원소를 발해군 태수로 임명하여 회유함과 동시에 한복을 기주목으로 삼아 원소가 거병하지 못하도록 견제했다.[4]
2. 1. 정치적 혼란
한나라 말, 환관과 외척의 전횡으로 인해 국정이 크게 혼란스러워졌다. 환관들은 매관매직을 일삼았고, 관리들의 부패는 극에 달했다. 이에 낙양(洛陽) 태학을 중심으로 모인 사대부들은 환관들의 행태를 비판하다가 대거 숙청되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당고의 금(黨錮之禁) 사건으로 인해 금고형에 처해졌다.[4] 이는 한나라가 민심을 잃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등 나라가 쇠퇴하는 징후가 나타났다.이러한 상황은 황건적의 난과 같은 대규모 반란으로 이어졌고, 환관들과 그들에게 뇌물을 바치고 벼슬을 얻은 관리들은 이러한 위기를 해결할 능력이 없었다. 결국 조정은 당고를 해제하고 청의파 관료들을 등용하여 반란을 진압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힘을 얻은 청의파는 환관 세력을 제거하는 데 앞장섰다.
이러한 움직임을 주도한 인물은 청의파 중에서도 과격파였던 원소(袁紹)였다. 그러나 원소는 십상시의 난으로 인한 영제(靈帝)의 죽음, 외척이었던 대장군 하진(何進)의 죽음, 십상시의 몰살 등 혼란스러운 상황을 틈타 군대를 이끌고 수도에 들어온 동탁이 황제를 옹립하고 군권을 장악하면서 정권 장악에 실패했다.[4]
권력을 잡은 동탁은 소제 유변(劉辯)을 폐위하고, 9살이었던 진류왕 유협(劉協)을 황제로 옹립했다. 이는 외척의 세력이 강한 소제 대신 어리고 후견인이 없는 유협을 옹립하여 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로 인해 동탁과 대립하던 원소는 실각하여 발해군으로 도망쳤고, 노식(盧植), 원술(袁術), 조조(曹操) 등 많은 명사들이 동탁을 피해 고향으로 돌아갔다. 동탁은 원소를 발해태수로 임명하여 회유하는 한편, 한복(韓馥)을 기주목으로 삼아 원소를 견제했다.
2. 2. 사회적 불안
한나라 말, 환관과 외척의 잦은 권력 남용으로 나라는 크게 쇠퇴했다. 환관들이 정권을 잡고 관직을 사고파는 일이 공공연하게 벌어졌고, 관리들의 부패는 극에 달했다. 낙양(洛陽)의 태학을 중심으로 모인 선비들은 청의당을 자처하며 환관들의 이러한 행태를 비판하다가 대거 숙청되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금고형에 처해졌다. 이것이 유명한 당고의 금(黨錮之禁) 사건인데, 이로 인해 한 제국은 백성들의 지지를 완전히 잃고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등 점차 멸망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마침내 황건적의 난과 같이 백성들의 불만을 모은 전국적인 규모의 반란으로 이어졌다. 정권을 잡고 있던 환관 일파와 그들에게 돈을 주고 벼슬을 산 무능한 관리들은 이러한 국가적 위기를 해결할 능력이 없었다.[1]2. 3. 당고의 금
한나라 말, 환관과 외척의 계속된 전횡으로 나라는 크게 쇠락했다. 환관이 정권을 잡아 매관매직이 공공연히 이루어지고 관리들의 부패가 극에 달했는데, 낙양(洛陽)의 태학을 중심으로 모인 사대부들은 청의당을 자칭하며 환관들의 행태를 비판하다가 대거 숙청되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금고형에 처해졌다. 이것이 유명한 당고의 금(黨錮之禁) 사건인데, 이로 인해 한 제국은 완전히 민심을 잃어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등 점차 말기적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1]3. 동탁의 집권
한나라 말, 환관과 외척의 전횡으로 인해 크게 쇠락한 조정은 당고의 금 사건을 통해 민심을 완전히 잃었다. 전국적인 반란이 일어나는 상황에서, 조정은 당고를 해제하고 청의파 관료들을 기용하여 반란을 진압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이 과정에서 힘을 얻은 청의파는 환관 세력을 절멸시켰다.
이를 주도한 인물은 원소였으나, 십상시의 난으로 인한 영제의 승하와 외척 하진의 죽음, 십상시의 몰살 등이 이어진 혼란을 틈타 군대를 이끌고 수도 낙양에 입성한 장군 동탁이 황제의 신병을 확보하고 금군을 장악하면서 정권 장악에 실패했다.[4]
정권을 잡은 동탁은 소제 유변을 폐위하고 헌제를 옹립했는데, 이는 어리고 후견인이 없는 유협을 옹립하고 그 후견인을 자처함으로써 정권을 마음대로 휘두르기 위한 사전 작업이었다. 이후 동탁은 원소를 발해군 태수로 임명하여 회유하는 한편, 한복을 기주목으로 삼아 원소가 거병하지 못하도록 견제했다. 이에 교모는 동탁의 죄악을 고하며 의병을 일으켜 동탁을 도모할 것을 촉구하는 삼공부의 공문을 위조하여 각지에 전달했고, 한복은 여론이 원소에게 향하는 것을 보고 마침내 원소의 거병을 승인했다.
3. 1. 동탁의 등장
한나라 말, 환관과 외척의 전횡으로 인해 크게 쇠락한 조정은 당고의 금 사건을 통해 민심을 완전히 잃었다. 전국적인 반란이 일어나는 상황에서, 조정은 당고를 해제하고 청의파 관료들을 기용하여 반란을 진압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이 과정에서 힘을 얻은 청의파는 환관 세력을 절멸시켰다.이를 주도한 인물은 원소였으나, 십상시의 난으로 인한 영제의 승하와 외척 하진의 죽음, 십상시의 몰살 등이 이어진 혼란을 틈타 군대를 이끌고 수도 낙양에 입성한 장군 동탁이 황제의 신병을 확보하고 금군을 장악하면서 정권 장악에 실패했다.[4]
정권을 잡은 동탁은 소제 유변을 폐위하고 헌제를 옹립했는데, 이는 어리고 후견인이 없는 유협을 옹립하고 그 후견인을 자처함으로써 정권을 마음대로 휘두르기 위한 사전 작업이었다.
3. 2. 소제 폐위와 헌제 옹립
한나라 말, 십상시의 난으로 영제가 승하하고 외척 하진과 십상시가 모두 죽는 혼란을 틈타 동탁이 군대를 이끌고 수도 낙양에 입성하여 황제의 신병을 확보하고 정권을 장악했다.[4]동탁은 소제 유변을 폐위하고 9살의 헌제를 옹립했는데, 이는 하태후라는 강력한 외척이 뒤에 있는 소제와 달리, 어리고 후견인이 없는 헌제를 옹립하여 정권을 마음대로 휘두르기 위한 조치였다. 190년 동탁은 소제를 폐위하고 진류왕을 헌제로 즉위시켰으며, 스스로 200년 전에 폐지된 상국 자리에 올랐다. 같은 해 3월 26일, 동탁은 소제와 하태후를 살해했다.[4]
이후 동탁은 조정에서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며 황제의 동의나 승인 없이 정책을 결정하는 등 전횡을 일삼았다. 또한, 자신에게 반대하는 세력들을 제거하며 권력을 강화했다. 원소는 동탁의 소제 폐위에 반대하다가 낙양에서 도망쳤고, 동탁은 원소가 반란을 일으킬 것을 우려하여 발해군 태수로 임명하여 회유하려 했다.[4]
3. 3. 동탁의 폭정
한나라 말, 환관과 외척의 전횡으로 나라는 크게 쇠락했다. 환관들은 정권을 잡고 매관매직을 일삼았으며, 관리들의 부패는 극에 달했다. 낙양의 태학을 중심으로 모인 사대부들은 환관들의 행태를 비판하다가 당고의 금 사건으로 대거 숙청되거나 금고형에 처해졌다. 이로 인해 한 제국은 민심을 잃었고,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등 점차 말기적 증세를 보였다. 황건적의 난과 같은 백성들의 불만을 결집한 전국적인 규모의 반란이 일어났지만, 환관 일파와 그들에게 돈을 바치며 벼슬을 샀던 무능한 관리들은 국가적 위기를 극복할 능력이 없었다. 결국 조정은 당고를 해제하고 청의파 관료들을 기용하여 반란을 진압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이 과정에서 힘을 얻은 청의파는 오히려 역공을 가해 환관세력을 절멸시키고 만다.이를 주도했던 인물은 청의파 중에서도 젊고 과격파의 필두로 여겨지던 원소였다. 하지만 원소는 정권 장악에 실패했는데, 이는 십상시의 난으로 인한 영제의 승하와 외척이었던 대장군 하진의 죽음, 십상시의 몰살 등이 이어진 극심한 혼란을 틈타 군대를 이끌고 수도에 입성한 장군 동탁이 황제의 신병을 확보하고 금군을 장악했기 때문이었다.[4]
정권을 잡은 동탁은 소제 유변을 폐위하여 홍농왕으로 강등시키고 당시 9살이었던 진류왕 유협(헌제)을 옹립했는데, 이는 하태후라는 강력한 외척이 뒤에 있는 소제와는 달리 어리고 후견인이 없는 유협을 옹립하고 그 후견인을 자처함으로써 정권을 마음대로 휘두르기 위한 사전 작업이었다. 190년, 동탁은 소제를 폐위하고 진류왕을 즉위시켰다. 동탁은 200년 전 폐지된 관직인 상국을 자처했다. 같은 해 3월 26일, 동탁은 유변(전 소제)과 하태후를 살해했다.
그 이후 동탁은 조정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권위적이었으며 황제의 동의나 승인을 구하지 않고 정책에 대한 최종 결정을 내리면서 절대 군주제를 무시했다. 그는 국가 기구에 대한 자신의 장악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조정에서 여러 반대자들을 제거했다.
4. 반동탁 연합군의 결성
189년 영제가 사망한 후, 대장군 하진은 십상시를 제거하기 위해 동탁을 낙양으로 불렀으나, 동탁이 도착하기 전에 하진은 환관들에게 암살당했다.[4] 이후 원소를 비롯한 하진의 측근들이 궁궐을 습격하여 환관들을 학살하는 혼란 속에, 어린 소제와 헌제는 궁궐 밖으로 피신했다가 동탁에게 발견되어 궁으로 돌아왔다.
이후, 군벌 정원은 소제를 폐위하려는 동탁의 결정에 반대하다 부하 여포에게 살해당했고, 여포는 동탁의 편에 섰다. 190년, 동탁은 소제를 폐위하고 헌제를 즉위시켰으며, 스스로 상국에 올라 권력을 독점했다. 동탁은 조정을 장악하고 반대파를 제거하며 폭정을 일삼았다.
이에 동군 태수 교모는 동탁을 역적으로 규탄하고 토벌을 촉구하는 격문을 전국에 배포했다. 격문은 수도의 관료들 이름으로 전국에 배포되어, 각지의 지방 관리와 군벌들이 동탁을 몰아내라는 요청에 응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탁의 폭정에 반발한 각지의 제후들이 190년 2월, 한곡관 동쪽에 군대를 모아 관동 연합군(關東聯軍)을 결성하면서 반동탁 연합군이 결성되었다.
4. 1. 연합군의 형성
190년 정월, 원소를 맹주로 하여 여러 군벌들이 연합군을 형성했다. 후장군 원술, 기주목 한복, 예주자사 공주, 연주자사 유대, 하내태수 왕광, 진류태수 장막, 광릉태수 장초, 동군태수 교모, 산양태수 원유, 제북상 포신 등이 참여했으며, 이들의 병력은 각기 수만에 달했다.[5] 조조 역시 분위장군을 칭하며 연합군에 가세했다.[5] 《영웅기(英雄記)》에 따르면, 유비 또한 조조와 함께 군대를 모아 동탁 토벌에 참여했다고 한다.191년, 헌제 대신 유우를 황제로 옹립하려 한 원소와 헌제를 인정하는 원술 간에 의견 대립이 발생했다. 유우는 황제가 이미 존재한다며 원소의 제안을 거절했다.
연합군은 낙양 동쪽 여러 지역에 주둔하여 낙양을 포위했다.
이 봉쇄로 인해 한 제국 동부 지역에서 수도로의 물자 공급이 차단되었고, 정부의 세수가 급격히 감소했다. 이에 동탁은 12동인 중 9개와 기타 보물을 녹여 청동을 모아 더 많은 주화를 주조했다.[6] 이 새로운 주화는 시장에 범람하여 제국 전역에 인플레이션을 야기했다.[7]
《삼국지연의》에서는 조조가 동탁 암살에 실패하고 고향으로 도망친 후, 황제의 이름으로 각 지역 군벌과 관리들에게 밀지를 보내 동탁에 대항할 것을 명령했다. 많은 이들이 이에 호응하여 반동탁 연합군(反董卓聯合軍)을 결성했다.
소설에서는 18명의 군벌이 참여하여 이 캠페인은 "십팔로 제후 토벌 동탁(十八路諸侯討董卓)"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군벌들은 연합에 충성을 맹세한 후 원소를 총사령관으로 추대했고, 원소는 마지못해 그 역할을 받아들였다. 원소는 원술에게 군량 조달을 맡기고, 손견을 선봉으로 임명하여 사수관을 공격하게 했다.


4. 2. 연합군의 목표
190년 정월, 원소는 동탁을 제거하고 한나라 조정을 바로 세우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5] 각지의 여러 군벌들이 이에 호응하여 연합군을 결성했다.동탁은 영제 사후 권력을 장악하고 소제를 폐위한 뒤 헌제를 옹립하는 등 전횡을 일삼았다.[4] 이에 교모는 동탁을 역적으로 규탄하고 토벌을 촉구하는 격문을 전국에 배포했다.
이에 원소를 비롯한 여러 군벌들이 동탁 토벌에 참여하여 연합군을 결성했다.[5] 연합군은 낙양을 포위하여 동탁을 압박했다. 그러나 연합군은 대부분 급조된 병력이었고, 경험이 부족하여 동탁의 정예병에 비해 열세였다.[8]
5. 연합군의 활동과 분열
190년 정월, 원소는 후장군 원술, 기주목 한복, 예주자사 공주, 연주자사 유대, 하내태수 왕광, 진류태수 장막, 광릉태수 장초, 동군태수 교모, 산양태수 원유, 제북상 포신 등과 더불어 연합군을 결성했다. 조조 역시 분위장군을 칭하며 연합군에 가세했다. 이들은 각기 수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동탁 토벌에 나섰다.[5]
연합군은 수도 낙양 동쪽 여러 지역에 주둔하여 낙양을 포위하는 형태를 취했다. 이 봉쇄로 인해 한 제국 동부 지역에서 수도로의 물자 공급이 차단되었고, 정부의 세수가 급격히 감소했다. 이에 동탁은 12동인 중 9개와 기타 보물을 녹여 청동 화폐를 주조했다.[6] 이 새로운 주화는 시장에 범람하여 제국 전역에 인플레이션을 야기했다.[7]
그러나 연합군은 대부분 급하게 소집된 병력이었고, 전투 경험이 부족했다. 반면 동탁군은 양주 반란 등에서 활약한 숙련된 병력이었다.[8] 이러한 전력 차이와 연합군 내부의 불협화음은 초기 전투에서 연합군이 고전하는 원인이 되었다.
191년, 헌제 대신 유우를 황제로 옹립하려 한 원소와 헌제를 인정하는 원술 간에 의견 대립이 생겼다. 유우는 이미 황제가 존재하는데 그 자신에게 불충을 권유하지 말라며 원소의 황제 옹립을 거절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연합군은 원소 진영과 원술 진영으로 갈라져 대립하기 시작했다. 유표는 원소와, 공손찬은 원술과 결합하는 등 제후들은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했다.
군량 조달을 담당하던 한복은 점차 연합군에 대한 보급을 중단했고, 그의 부하 곽우가 반란을 일으켜 원소에게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원소는 보급원을 확보하기 위해 한복의 기주(冀州)를 빼앗을 음모를 꾸몄고, 공손찬과 협력하여 기주를 공격했다. 결국 한복은 기주를 원소에게 넘겨주었다.
원소는 주우 (인명)를 보내 낙양에서 원술에게 돌아가던 손견을 공격하게 했다. 양성 전투에서 주는 양성의 손견 진영을 기습하여 점령했다. 원술은 공손월(公孫越)을 보내 손견을 도왔으나, 손견은 승리했지만 공손월은 전투에서 사망했다. 공손찬은 공손월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원소에게 물었고, 이로 인해 계교 전투가 발발했다.
이처럼 연합군은 내부 갈등과 분열로 인해 동탁 토벌이라는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와해되었다.
5. 1. 주요 전투
14세기 역사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작가 나관중이 주요 등장인물을 더 잘 묘사하기 위해 이 캠페인의 일부 세부 사항을 상당히 자유롭게 각색했다.《삼국지연의》 제5회에서 조조는 동탁 암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고향인 진류로 도망쳤다. 이후 조조는 황제의 이름으로 각 지역 군벌과 관리들에게 밀지를 보내 동탁에 대항하여 그를 권좌에서 몰아낼 것을 명령했다. 많은 이들이 이 부름에 응답하여 반동탁 연합군(反董卓聯合軍)을 결성했다.
소설에서는 연합군에 참여한 구성원들의 목록이 약간 다르다.
번호 | 참여자 | 직책 |
---|---|---|
제1진 | 남양 태수 원술 | 후장군(後將軍) |
제2진 | 한복 | 기주 자사(刺史) |
제3진 | 공주 | 예주 자사 |
제4진 | 유대 | 연주 자사 |
제5진 | 왕광 | 하내 태수 |
제6진 | 장막 | 진류 태수 |
제7진 | 교모 | 동군 태수 |
제8진 | 원유 | 산양 태수 |
제9진 | 포신 | 제북상 |
제10진 | 공융 | 북해 태수 |
제11진 | 장초 | 광릉 태수 |
제12진 | 도겸 | 서주 자사 |
제13진 | 마등 | 서량 태수 |
제14진 | 공손찬 | 북평 태수, 유비를 동참시킴 |
제15진 | 장양 | 상당 태수 |
제16진 | 손견 | 장사 태수 |
제17진 | 원소 | 발해 태수 <맹주> |
제18진 | 조조 | 효기교위 |
소설에서는 18명의 군벌이 참여하여 이 캠페인은 "십팔로 제후 토벌 동탁(十八路諸侯討董卓)"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군벌들은 연합에 충성을 맹세한 후 원소를 총사령관으로 추대했고, 원소는 마지못해 그 역할을 받아들였다. 원소는 원술에게 군량 조달을 맡기고, 손견을 선봉으로 임명하여 사수관을 공격하게 했다.
반동탁 연합군은 원소를 맹주로 추대하고 낙양으로 진군한다. 원술이 식량과 꼴을 관리하고 손견이 선봉이 되어 사수관으로 전진한다. 동탁은 화웅을 효기교위(驍騎校尉)로 임명하고 군사 5만 명과 이숙, 호진, 조잠(趙岑)을 붙여 맞서게 한다. 포신은 손견에게 공을 뺏길까 염려해 동생 포충으로 하여금 사수관을 먼저 공격하게 한다. 화웅이 포충을 무찌르고 그 수급을 올려 도독(都督)이 더해진다.
손견이 정보, 황개, 한당, 조무를 거느리고 사수관에 닿는다. 화웅은 부장 호진에게 5,000명을 줘 출진시키는데 정보한테 죽임을 당한다. 손견은 양(梁)의 동쪽에 주둔하면서 원술에게 양식을 독촉한다. 누군가 원술에게 “손견은 강동의 맹호입니다. 손견이 낙양까지 진출해 동탁을 죽인다면 늑대를 제거하겠다고 호랑이를 불러들이는 격입니다. 군량을 끊어 흩어지게 하소서.”라고 진언한다. 원술이 이에 따라 손견군은 굶주림에 시달린다. 이숙이 이를 이용하여 자신은 손견군의 뒤에서, 화웅은 앞에서 기습할 것을 제안한다. 손견군은 대파되고 조무가 손견의 붉은 두건을 대신 착용해 화웅을 유도함으로써 손견의 목숨을 구한다. 조무는 추격을 뿌리칠 수 없자 타다 남은 기둥에 두건을 걸어두고 수풀 속에 잠복한다. 화웅이 두건을 취하려 할 때 조무가 덮쳤다가 반격을 받고 사망한다.
화웅이 연합군 진영까지 와서 싸움을 건다. 원술의 부하 유섭이 응전했다가 전사하고, 한복의 부하 반봉도 나섰다가 전사한다. 이때 관우가 자원하는데 그 직책이 유비의 마궁수(馬弓手)에 불과해 원술이 제후들을 깔보냐며 화낸다. 조조가 중재하여 관우를 출전하게 하고 따뜻한 술 한 잔도 권한다. 관우는 따라두기를 청하고 나아가 술이 채 식기도 전에 화웅의 머리를 베어온다. 심기가 불편한 원술 대신 조조가 몰래 유비 삼형제에게 쇠고기와 술을 줘 위무한다.
동탁은 사위 이유의 조언을 받아들여 원소의 숙부 원외가 연합군에 내통할 것을 대비해 일가까지 처형한 후 이각과 곽사는 5만 명으로 사수관을 지키게 하고, 동탁은 몸소 이유·여포·번조·장제와 15만 명을 이끌고 호뢰관(호로관)을 수비한다. 여포는 3만 명으로 호뢰관 앞에 진친다. 연합군은 군을 나누어 왕광, 교모, 포신, 원유, 공융, 장양, 도겸, 공손찬의 8로 제후가 호뢰관으로 진격하고 조조는 두 지점을 왕래하며 돕기로 한다.
왕광이 가장 빨리 오고 여포가 철기(鐵騎) 3천 명으로 맞이한다. 하내군의 명장 방열은 여포에게 척살당하고 왕광군이 대패한다. 교모군과 원유군이 왕광을 구하고 30리 물러나 군영을 세운다. 여포가 도전해온다. 장양의 부장 목순이 상대했다가 불귀의 객이 된다. 공융의 부장 무안국은 손목이 잘리는 부상을 입는다. 팔로군이 일제히 나가 무안국을 구하니 여포가 잠시 회군했다가 또 쳐들어온다. 이번엔 공손찬이 친히 맞서는데 수 합이 되지 않아 패주한다. 여포의 적토마가 워낙에 빨라 방천화극으로 공손찬의 등을 찌르려는 찰나 유비의 의형제 장비가 ‘세 개 성을 가진 종놈’이라 도발하며 뛰쳐나온다. 50여 합을 붙어도 승부가 나지 않자 관우도 합류한다. 30합을 더 겨뤄도 쓰러지지 않아 유비까지 가세해 싸운다. 비로소 여포가 견디지 못하고 후퇴한다. 여덟 제후의 군병들도 한꺼번에 나가 쳐부수고 호뢰관 가까이 다다른다.
승전 소식에 원소는 손견에게도 출정하라 한다. 손견은 먼저 원술한테 가 ‘돌과 화살도 무릅쓰는 것은 위로는 역적을 처단하고 아래로는 장군의 가문을 위해서인데, 참언만 듣고 보급을 안 해주면 패하여 장군도 위험해진다’고 한다. 원술이 할 말이 없어 모함했던 이를 참하여 사죄한다. 이각은 동탁의 딸과 손견의 아들을 혼인시키고 싶다는 동탁의 의사를 손견에게 전했다가 노여움만 산다.
이유는 “서쪽에도 한나라 있고 동쪽에도 한나라 있네. 사슴이 장안으로 가면 이 환난도 사라진다네.”[12]라는 근간의 동요처럼 장안으로 수도를 옮길 것을 제의한다. 이어서 설명하길 ‘서쪽의 한나라는 한고조가 서쪽인 장안에 도읍해 12대를 이은 전한(서한)을, 동쪽의 한나라는 광무제가 동쪽인 낙양에 도읍해 역시 12대를 이은 후한(동한)을 뜻하므로 장안 천도는 천운에도 부합한다’고 한다. 동탁이 급히 낙양으로 가 그 뜻을 밝힌다. 양표, 황완, 순상(荀爽), 주비, 오경(伍瓊)이 반대한다. 양표, 황완, 순상은 관직과 작위를 박탈하고 이전에 원소에게 태수직을 추천했었던 주비와 오경은 참수한다.
천도를 강행한다. 원소 등의 문하 집안과 부자 수천 가를 몽땅 처형하고 그 재산을 몰수하니 이것도 이유의 모략이다. 수백만 명의 백성들을 끌고 간다. 죽은 이 헤아릴 수 없고 울부짖는 소리 천지를 진동한다. 성문, 민가, 종묘, 궁궐 등 낙양을 송두리째 불태워 폐허로 만든다. 한나라의 능침도 파헤쳐 각종 보화를 챙긴다.
제후들은 두 관을 거쳐 낙양으로 들어가고 가장 일찍 당도한 손견이 화재를 진압한다. 조조가 동탁을 뒤쫓자고 호소하지만 다들 주저하기에 조조만이 성을 내며 1만여 명으로 뒤쫓는다. 형양(滎陽)을 지나 동탁의 행렬을 따라잡는다. 하후돈이 여포에게 돌진하여 수 합이 되지 않았는데 좌측에서 이각이, 우측에서 곽사가 쇄도해온다. 좌측은 하후연이, 우측은 조인이 대적하지만 삼면 공격을 버틸 수가 없다. 크게 무너져 형양 방향으로 도주한다. 2경(更), 어느 황량한 산 아래서 패잔병을 수습하고 밥을 지으려는데 미리 매복해 있던 서영에게 내습당한다. 이 모든 게 이유의 책략이다.
조조는 서영의 화살에 어깨를 맞고도 필사적으로 탈출을 시도하나 말까지 두 병졸의 창에 찔리면서 낙마한다. 이때 조홍이 나타나 두 군졸을 처리하고 ‘천하에 조홍은 없어도 되지만 조조는 없으면 안 된다’며 말까지 내준다. 강에선 조홍이 조조를 업고 건너가 겨우 위기를 벗어난다. 30여 리를 더 내빼다가 잠깐 쉬는데 서영이 도강하여 여기까지 추적해온다. 하후돈이 서영을 수 합 만에 고꾸라트린다. 살아남은 군병 500여 명뿐이다.
5. 2. 손견의 활약
191년, 손견은 병력을 수습하여 영인에 주둔하고 있었다. 호진은 화웅, 여포 등과 같이 손견을 공격했으나 손견에게 대패하였고 손견은 도위 화웅 등의 목을 베었다.[1] 동탁은 손견의 용맹과 굳셈을 두려워하여 이각을 손견에게 사신으로 보내어 화친을 청했지만 손견은 역적과 손을 잡을 수 없다는 이유로 화친을 거절하고 낙양에 입성했다.[1]반동탁 연합군은 원소를 맹주로 추대하고 낙양으로 진군했고, 원술이 식량과 꼴을 관리하고 손견이 선봉이 되어 사수관으로 전진했다.[1] 손견은 정보, 황개, 한당, 조무를 거느리고 사수관에 닿았는데, 이때 화웅은 부장 호진에게 5,000명을 주어 출진시키지만 정보에게 죽임을 당했다.[1] 손견은 양(梁)의 동쪽에 주둔하면서 원술에게 양식을 독촉했는데, 누군가 원술에게 손견이 낙양까지 진출해 동탁을 죽인다면 늑대를 제거하겠다고 호랑이를 불러들이는 격이라며 군량을 끊어 흩어지게 하라고 진언했다.[1] 이에 원술이 손견에게 군량 보급을 중단하여 손견군은 굶주림에 시달렸다.[1]
이때, 이숙이 이를 이용하여 자신은 손견군의 뒤에서, 화웅은 앞에서 기습할 것을 제안하여 손견군은 대파되고, 조무가 손견의 붉은 두건을 대신 착용해 화웅을 유도함으로써 손견의 목숨을 구했다.[1] 조무는 추격을 뿌리칠 수 없자 타다 남은 기둥에 두건을 걸어두고 수풀 속에 잠복했는데, 화웅이 두건을 취하려 할 때 조무가 덮쳤다가 반격을 받고 사망했다.[1]

남쪽의 여양에서 원술과 합류한 손견은 2만에서 3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반란군 토벌 장군(破虜將軍) 칭호와 예주 자사 직을 원술로부터 받았다. 원술은 손견을 선봉으로 삼았고, 손견은 여양에서 군대를 훈련시켰다.[1]
190년 겨울, 동탁은 1만 명의 병력을 보내 여양을 공격했다. 당시 손견의 군대는 술자리를 벌이고 있었지만, 손견은 소식을 듣고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침착하게 술잔을 돌리면서 병사들이 진형을 갖추도록 했다. 이러한 군기를 본 동탁의 군대는 방향을 돌려 후퇴했다.[1]
191년 3월, 손견은 군대를 북쪽의 양동(梁東)으로 이동시켰지만, 그곳에서 서융에게 수적으로 불리했다. 수십 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포위망을 뚫었다. 붉은 두건이 자신을 쉽게 식별하게 한다는 것을 깨달은 손견은 측근 조무(祖茂)에게 두건을 넘겨주었고, 서융의 군사들은 조무를 쫓는 동안 손견은 탈출했다. 조무는 나중에 반쯤 타버린 기둥에 두건을 걸어놓고 근처의 높은 풀 속에 숨었다. 적들은 기둥을 포위하고 조심스럽게 접근하다가 속았다는 것을 깨닫고 후퇴했다.[1]
흩어진 군대를 다시 모은 손견은 양인(陽人, 현재의 허난성 루저우시 웬취안) 부근으로 가서 진을 쳤다. 이번에 동탁은 화웅, 호진, 여포에게 5천 명의 병력을 주어 손견을 공격하게 했다. 그러나 기병을 지휘하는 여포는 호진과 사이가 좋지 않아 그와 다퉜다. 손견은 이 기회를 틈타 그들을 공격했고, 동탁의 군대는 궤멸되었다. 화웅은 손견에게 사로잡혀 즉시 처형되었다.[1]
이때 누군가가 원술에게 만약 손견이 동탁을 물리치고 수도를 차지하면 더 이상 제어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고, 의심을 품은 원술은 손견에게 보급품 공급을 중단했다.[1] 손견은 양인에서 밤에 100여 리를 달려 여양으로 가서 원술을 만났고, 그에게 "저는 국가를 위해 역적(동탁)을 제거하고, 둘째로 당신의 친족(원술의 숙부는 동탁에게 살해당함)의 죽음에 복수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싸웠습니다. 저는 동탁과 개인적인 원한이 없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비방하는 말을 믿고 저를 의심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에 원술은 부끄러움을 느껴 즉시 식량 공급을 명령했다.[1]
손견을 두려워한 동탁은 부하 이각을 사신으로 보내 화평을 요청하고 동맹을 맺고자 했다. 이각은 또한 손견의 아들들에게 관직을 약속했다. 이에 손견은 "동탁은 하늘에 거역하고 법을 어겼다. 내가 당신과 당신의 일족을 모두 죽여 그들의 머리를 사해에 보여주기 전에는 평화롭게 죽을 수 없을 것이다. 어떻게 당신과 동맹을 맺을 수 있겠는가?"라고 대답했다.[1]
손견은 그런 다음 군대를 이끌고 낙양 남쪽 90리 떨어진 요새화된 관문인 대곡관(大谷關)으로 향했다. 동탁은 후한 왕릉에서 직접 전투를 벌였지만 패배하여 낙양 서쪽의 민츠와 산(陝)으로 도주했다. 손견은 계속 낙양으로 진격하여 여포의 군대를 만나 격파했다. 자리를 잡은 손견은 부하들에게 동탁이 파헤친 전 황제들의 능을 다시 봉인하도록 명령했다. 위소의 오서에는 손견이 낙양 남쪽의 우물에서 잃어버린 옥새를 찾아 자신이 보관했다는 이야기가 있다.[1]
5. 3. 연합군의 분열
옥새를 둘러싼 갈등과 제후들 간의 이해관계 충돌 등으로 인해 연합군은 분열되었다. 손견은 낙양에서 전국옥새를 발견했으나, 이를 눈치챈 원술이 손견의 아내를 인질로 잡아 옥새를 요구했다. 결국 손견은 아내를 지키기 위해 옥새를 원술에게 넘겨주었다.[4]191년, 헌제 대신 유우를 황제로 옹립하려 한 원소와 헌제를 인정하는 원술 간에 의견 대립이 생겼다. 유우는 이미 황제가 존재하는데 자신에게 불충을 권유하지 말라며 원소의 황제 옹립을 거절했다. 이로 인해 연합군은 원소 진영과 원술 진영으로 갈라져 서로 전쟁을 벌였다. 유표는 원소와, 공손찬은 원술과 결합했다. 손견은 원술의 명을 받고 유표를 공격했다가 전사했다.[4]
한편, 손견은 전국옥새를 수중에 숨긴 채 강동으로 돌아가려 했다. 부하 중 원소와 동향인 자가 이를 원소에게 알렸다. 원소가 조정의 보물은 조정에 있어야 한다며 옥새를 공개할 것을 요구하자 손견은 맹세하며 부인했다. 손견군은 원소군과 충돌 직전까지 갔다가 제후들이 믿어준 덕분에 병을 핑계로 낙양을 떠났다. 원소는 형주자사 유표에게 옥새를 강탈하라는 편지를 보냈다.[4]
이튿날, 조조는 제후들이 저마다 다른 마음인 것을 확인하고 양주로 향했다. 공손찬도 철수하고 유비를 평원상으로 삼았다. 유대는 교모에게 식량을 빌려달라고 청했다가 거절당하자 교모를 살해하고 그 무리를 취했다. 제후들은 각기 찢어졌고 원소는 하내군으로 갔다. 손견은 유표의 공격을 받아 군사를 태반이나 잃었지만 강동으로 복귀하는 데 성공했다.[4]
원소와 원술의 대립은 연합군 분열의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 군량 조달을 담당하던 한복은 점차 연합군에 대한 보급을 중단했다. 그의 부하 곽우가 그에게 반란을 일으켜 그를 격파하고 원소에게 투항했다. 이 사건은 원소에게 보급원을 확보해야 할 필요성을 깨닫게 했고, 그는 한복의 기주(冀州)를 빼앗을 음모를 꾸몄다. 원소는 공손찬과 은밀히 협력하여 한복의 기주를 공격했고, 결국 한복은 기주를 원소에게 넘겨주었다.
원소는 주우 (인명)를 보내 낙양에서 원술에게 돌아가던 손견을 공격하게 했다. 양성 전투에서 주는 양성의 손견 진영을 기습하여 점령했다. 원술은 공손월(公孫越)을 보내 손견을 도와 주우와 싸우게 했다. 손견이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손월은 전투에서 사망했다. 공손찬은 공손월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원소에게 물었고, 이로 인해 계교 전투가 발발했다.[4]
그 무렵, 연합은 실패하여 와해되었고, 이름만 남아있었다.
6. 동탁의 죽음과 이후의 혼란
189년 영제 사후 권력을 잡은 동탁은 190년 소제를 폐위하고 헌제를 옹립한 뒤 스스로 상국에 올라 잔혹한 통치를 이어갔다.[4] 그는 자신의 일족과 인척을 요직에 앉히고, 반대하는 자들을 가차없이 제거하며 공포 정치를 펼쳤다. 동탁은 황제의 동의나 승인을 구하지 않고 정책에 대한 최종 결정을 내리는 등 절대 군주제를 무시하고 조정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4]
하지만 동탁의 폭정은 결국 왕윤과 여포 등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192년에 암살당했다.[4]
6. 1. 동탁 암살
왕윤, 황완, 사손예, 양찬 등 조정 관리들은 동탁 암살을 모의했다.[3] 이들은 여포를 설득하여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였는데, 여포는 동탁에게 손도끼를 던지고 동탁의 시녀와 불륜을 저지르는 등 동탁과의 관계가 악화된 상태였다.[3]192년 5월 22일, 동탁이 수레를 타고 회의에 참석하러 가던 중 이숙이 접근하여 동탁을 찔렀다.[4] 동탁은 여포에게 자신을 보호해 달라고 외쳤지만, 여포는 동탁을 죽였다.[4] 동탁의 친척들은 처형되었고, 그의 시신은 장안 거리에 전시되었다.[4] 시신을 지키던 관리는 배꼽에 심지를 꽂아 시신에 있는 지방으로 며칠 동안 불을 밝혔다.[4]
6. 2. 동탁 사후의 권력 투쟁
동탁 사후, 東漢|동한중국어 왕조의 권력은 동탁의 잔당에게 넘어갔고, 이는 전국적인 권력 투쟁으로 이어졌다.[4] 번주, 곽사, 이각 등 동탁의 부하들은 자신들의 충성이 반역으로 간주될 것을 우려하여 도망쳤다.[4] 왕윤은 동탁 사후 정권을 장악하고 이들의 사면 요청을 거절하며 "사면해야 할 자들 중에서 그들은 예외다."라고 말했다.[4] 이에 격분한 동탁의 부하들은 전쟁을 일으켰으나, 처음에는 여포와 황실 군대에 패배했다.[4] 그러나 결국 동탁의 잔당은 여포를 속여 장안을 장악하고 왕윤을 살해했다.[4]6. 3. 군웅할거 시대의 개막
동탁 사후, 그의 부하였던 번주, 곽사, 이각 등은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도망쳤다. 그러나 동탁 사후 정권을 장악한 왕윤은 이들에 대한 사면 요청을 거부했다. 왕윤은 "사면해야 할 자들 중에서 그들은 예외다."라고 말하며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4] 이에 격분한 동탁의 잔당들은 결국 전쟁을 일으켰고, 여포와 황실 군대에 패배했다. 하지만, 동탁의 잔당들은 여포를 속여 장안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고, 왕윤은 살해되었다.[4]이후, 동한 왕조의 권력은 동탁 잔당의 손에 넘어갔고, 이는 점차 권력 투쟁으로 이어져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각지의 군벌들이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면서 본격적인 군웅할거 시대가 시작되었다.
7. 역사적 의의
동탁에 대항하는 연합군의 결성과 와해는 후한 말의 혼란상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는 결국 삼국시대의 개막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4]
7. 1. 후한 왕조의 붕괴 가속화
한나라는 환관과 외척의 전횡으로 쇠락했으며, 당고의 금 사건으로 민심을 잃었다. 십상시의 난으로 영제가 승하하고 하진이 죽는 등 혼란이 이어졌다. 군대를 이끌고 수도에 입성한 동탁이 황제의 신병을 확보하고 정권을 장악했다.[4] 동탁은 소제를 폐위하고 헌제를 옹립했으며, 상국을 자처하며 권력을 휘둘렀다. 이에 반발한 원소는 낙양에서 도망쳤고, 동탁은 원소를 회유하기 위해 발해군 태수로 임명했다. 이 과정에서 중앙 정부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지방 군벌들의 세력이 강화되었다.7. 2. 삼국시대의 서막
한나라 말, 환관과 외척의 전횡으로 인해 한나라는 크게 쇠락했다. 환관들이 정권을 잡아 매관매직이 공공연히 이루어지고 관리들의 부패가 극에 달했다. 낙양의 태학을 중심으로 모인 사대부들은 청의당을 자칭하며 환관들의 행태를 비판하다가 대거 숙청되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금고형에 처해졌다. 이것이 당고의 금 사건인데, 이로 인해 한 제국은 민심을 잃고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등 말기적 증세를 보였다. 이러한 양상은 황건적의 난과 같은 전국적인 규모의 반란으로 이어졌고, 환관 일파와 그들에게 돈을 바치며 벼슬을 산 무능한 관리들은 국가적 위기를 극복할 능력이 없었다. 결국 조정은 당고를 해제하고 청의파 관료들을 기용하여 반란을 진압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 과정에서 힘을 얻은 청의파는 오히려 역공을 가해 환관세력을 절멸시키고 만다.이를 주도했던 인물은 청의파 중에서도 젊고 과격파의 필두로 여겨지던 원소였다. 하지만 원소는 정권 장악에 실패했는데, 이는 십상시의 난으로 인한 영제의 승하와 외척이었던 대장군 하진의 죽음, 십상시의 몰살 등이 이어진 극심한 혼란을 틈타 군대를 이끌고 수도에 입성한 장군 동탁이 황제의 신병을 확보하고 금군을 장악했기 때문이었다.
정권을 잡은 동탁은 곧 황제였던 소제 유변을 폐위하여 홍농왕으로 강등시키고 당시 9살이었던 진류왕 유협(劉協)을 옹립했는데, 이는 하태후라는 강력한 외척이 뒤에 있는 소제와는 달리 어리고 후견인이 없는 유협을 옹립하고 그 후견인을 자처함으로써 정권을 마음대로 휘두르기 위한 사전 작업이었다. 이를 두고 동탁과 대립한 끝에 원소는 실각하여 달아나게 되었고 기주 발해군에서 세력을 형성했다. 그 외에도 노식, 원술, 조조 등의 많은 명사들이 동탁에게서 달아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190년 정월, 원소는 후장군 원술, 기주목 한복, 예주자사 공주, 연주자사 유대, 하내태수 왕광, 진류태수 장막, 광릉태수 장초, 동군태수 교모, 산양태수 원유, 제북상 포신 등과 더불어 연합했고 무리는 각기 수만을 헤아렸다고 한다. 조조 역시 분위장군을 칭하며 연합군에 가세했다. 191년, 헌제 대신 유우를 황제로 옹립하려 한 원소와 헌제를 인정하는 원술 간에 의견 대립이 생겼다.
이러한 군웅들의 등장은 삼국시대 정립의 기반을 마련했다.
참조
[1]
서적
Zizhi Tongjian
[2]
서적
Cao Cao's claims
2010
[3]
서적
Yingxiong Ji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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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서적
Sanguozhi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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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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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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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서적
2010
[10]
서적
Zizhi Tongjian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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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o Cao's clai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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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기타
西頭一個漢 東頭一個漢. 鹿走入長安 方可無斯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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